【독립】 그 시작을 알리는 민족의 외침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의 탄압에 항거,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한 날입니다. 많은 이들의 뜨겁고 치열했던 3·1 운동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하는 날, 그날이 바로 삼일절(3.1절)입니다.
3·1 운동의 배경
일본은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한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마침내 1910년 경술년에 국가의 권력을 잃어버린 치욕의 날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억압받고 있을 때 세계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 국외적 배경 : 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모든 민족은 그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으로 내세웠고, 러시아의 레닌 역시 열강의 제국주의에 핍박받는 약소민족에게 지원해 주겠다는 이야기에 강대국에 지배받던 나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됩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보이기 위해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이었던 이광주,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 600여 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적의 심장부에서 만세 운동을 부른 2.8 독립선언을 하게 됩니다.
- 국내적 배경 :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있습니다. 이 죽음이 일본의 독살에 의한 죽음이란 소문에 지난 10년간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가 됩니다.
3·1 운동의 전개
최남선이 기초하고 한용운 선생이 추가를 하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태극기와 함께 은밀히 준비합니다. 독립선언의 날짜는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회의를 거쳤는데, 첫 번째 안건은 고종황제 장례식인 3월 3일로 정하였으나 천도교 대표 15인이 황제 장례식날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불경이라는 의견에 3월 2일로 바꾸기로 했는데 16인의 기독교인이 3월 2일은 일요일로 기독교에서 안식일이라 주장하여 결국 3월 1일 토요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장소는 탑골 공원으로 결정하였지만 당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종로 태화관으로 모임장소를 옮깁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한용운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스스로 일본 경찰에 신고해 잡혀갑니다. 같은 시각, 수천 명이 모인 탑골공원에서는 민족대표들이 오지 않자 학생대표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숨겨 두었다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만세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일본의 경찰과 군대가 출동해 칼로 찌르고 총격을 가했고 그렇게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하며 더욱 목소리를 높여 만세운동을 하였습니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는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 동시에 만세시위로 퍼지기 시작했고, 뿐만 아니라 만주, 연해주, 미주 등 전 세계로 독립운동이 퍼져나갔습니다.
3·1 운동의 영향
이렇듯 1919년에 시작했지만 독립은 1945년에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3·1 운동이 실패한 것일까요? 3·1 운동은 독립운동의 분수령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고 국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 일제 통치 방식의 변화 :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폭력적인 통치방식에서 문화통치로 선회하여 더 잔인해졌습니다.
- 대대적인 독립운동의 시작 : 나라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 : 국내적 사회, 경제, 문화적 민족운동과 국외적 다양한 외교적 활동, 의거활동, 무장독립투쟁.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이후 우리나라가 광복될 때까지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약소민족의 독립운동 : 인도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과 중국의 '5·4 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도화선이 됐습니다.
3·1 운동의 영웅들
유관순 열사(1999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는 당시 이화학당 1학년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가,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학생단 가두시위 운동에 참가,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주도 시위 중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실형 선고받고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며 독립만세운동 전개, 9월 28일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옥사하셨습니다.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많은 분들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바람으로 일제의 탄압에도 포기하지 않고 평화로운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다음 분들은 2023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셨으며,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서 고초를 겪었던 분들입니다.
- 권애라(1897~1973, 1990년 애국장) : 개성에서 3·1 만세운동 주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선고.
- 심영식(1887~1983, 1990년 애족장) :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개성에서 3·1 만세운동 참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선고.
- 임명애(1886~1938, 1990년 애족장) : 파주에서 3·1 만세운동 주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선고.
- 신관빈(1885~미상, 2011년 애족장) : 개성에서 군중들에게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 (후손을 찾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지금의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독립운동가 분들을 모두 기억하고 그분들의 행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이 오지 않도록 기억해야 하는 날 3·1 운동 이야기였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2023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에 대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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